안녕하세요. 한국경제에 소개된 새로운 고택 활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네 죄를 알렷다!" 살벌한 포도청서 달콤한 빵냄새가…
600년 수도 서울의 고택들
'20세기 뉴타운' 북촌
'설화수의 집' 한옥·양옥 결합
100년 대저택은 고급 호텔로
'힙'한 트렌드 더해지며 재탄생
한양도성 옆 만리재고개
美 장군 사택, 카페로 바뀌고
1950년대 한옥은 '위스키바'로
사람들은 흔히 서울이 아파트로만 뒤덮여 있고, 오래된 건물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 반은 맞는 말이다. 외세의 강점과 전쟁을 거치며 서울의 수많은 오래된 건물들은 철저히 파괴됐다. 압축성장기 ‘비효율적’이란 이유로 철거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이 간과하는 게 있다. 서울이 600년이 넘는 기간 수도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도시라는 점. 고도(古都)의 흔적은 여전히 서울 도심 곳곳에서 묻어난다. 세계 각국의 관광객과 평생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도시인에게 도심 속 고택은 유리 커튼월의 고층 빌딩과 넓은 도로 사이 오아시스가 됐다.
‘100년 고택’이 호텔과 미술관으로
1920년대 어느 날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화백은 “꼭 서양화를 고집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서양화는 지금 사회와 아주 동떨어진 예술이 아닌가”라고 자신에게 반문한다. 서양화의 한계를 느꼈던 그는 전통적 수묵화법에 서양화의 색채와 기법을 사용해 새로운 한국화를 시도했다. 그가 1918년 직접 설계하고 40년 넘게 살았던 집은 그의 화풍을 반영하듯 전통 한옥에 서양식과 일본식 가옥 양식이 접목됐다.
지금은 고희동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이곳은 북촌(北村)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북쪽 마을’이라는 이 단순한 이름은 오로지 일제강점기 청계천 이남의 일본인 거주 구역 ‘남촌(南村)’과의 구분을 위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북촌과 남촌의 경계는 일본인 인구가 늘며 점차 희미해져 갔다. 조선인들이 점차 도성 밖으로 밀려나자 훗날 ‘한국 최초의 디벨로퍼’란 별명이 붙은 정세권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정세권은 조선인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가회동, 계동, 삼청동 일대에 한옥 대단지를 건설했다. 기존엔 양반들이 거주하던 넓은 택지를 쪼개는 대신 여러 채의 작은 한옥을 대량 공급했다. 규모만 컸던 게 아니다. 화장실은 한옥 안으로 들어갔고, 부엌은 입식 구조로 바뀌었다. 전통 한옥에 혁신적인 20세기의 색깔이 입혀진 일종의 ‘뉴타운’이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20세기 뉴타운’ 북촌엔 21세기의 색깔이 입혀지고 있다. 화장품 브랜드 ‘설화수’는 1930년대 지어진 한옥과 1960년대 지어진 양옥을 연결해 자사의 플래그십 스토어 ‘북촌 설화수의 집’으로 탈바꿈했다. 각기 전혀 다른 양식으로 지어졌고, 전혀 다른 주인들이 살고 있던 두 고택은 그 사이를 가로막던 축대가 해체되고 중정이 생기자 유기적으로 하나가 됐다.
골목 뒤편엔 청기와가 얹어진 넓은 한옥이 숨어 있다. 1900년대 초기에 건설된 이 대형 고택은 현재 고급 한옥 호텔 ‘노스텔지어블루재’로 재탄생했다. 20세기 뉴타운 특유의 높은 담장에 속살을 쉽게 보여주진 않지만 지난 3월엔 한 친환경 화장품 브랜드의 팝업스토어 공간이 되기도 했다.
커피와 위스키, 고택을 만나다
‘처음 이 집이 지어진 날을 떠올려 본다. 그때에도 누군가가 안채의 대청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도심 속 넓은 중정이 있는 한 100년이 넘은 고택 대문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포도청이었다가 구한말 요정(料亭)이 되기도 했고, 광복 후엔 한정식집이기도 했다. 이젠 관광객들의 필수코스가 된 ‘어니언 안국점’에서 사람들은 신발을 벗고 사랑채에 들어가 양반다리를 한 채 커피를 마신다. 테이블 대신엔 소반이 있다. 대청마루에 앉아 ‘ㅁ자’ 하늘을 바라보거나 고무신을 신고 중정을 거닐 수도 있다.
도성 밖 만리재 초입엔 백 년간 이 자리를 지킨 번듯한 적산가옥이 있다. 1932년 일본인 인쇄소 사장의 사택으로 지어진 이 집은 광복 후 미군정 사단장의 사택으로 사용됐다. 6·25전쟁이 끝난 뒤엔 한 한국 정치인 가족의 보금자리가 됐던 이곳은 ‘더 하우스 1932’라는 카페로 재탄생했다. 내부 곳곳에 있는 목조 기둥엔 이 집을 거쳐간 수많은 가족의 발자취가 나이테처럼 녹아 있다.
골목에서 내려오면 1910년 지어진 석조 건물이 있다. 병원, 우체국, 인쇄소로 사용된 이 건물은 현재는 ‘베리키친’이란 이름의 퓨전음식점으로 다시 태어났다. 엄밀히 말하면 고택(古宅)은 아니지만 100년의 세월 동안 이 공간을 다른 목적으로 지나쳐간 수많은 사람의 말소리와 발자국이 묻어난다. 길 건너 서계동엔 70년 된 고택이 위스키바 ‘청파랑’으로 재탄생했다. 한옥의 외관만 살린 게 아니다. 한옥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바와 벽면엔 전돌이 오브제로 사용됐다.
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
"손때 타야 더 오래간다"…쓰임새 바꿔 문화가 된 옛집
'영남 사대부' 고택의 변신
부산 적산가옥
광복 이후 요정으로 쓰던 정란각
아이유 '밤편지' 뮤비 촬영장소로
대구 지동마을
'한훤당 고택' 일부 개조해 카페로
김굉필 선생 20대손이 거주·운영
"한옥은 소통의 공간 돼야 오래가"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한옥을 밖에서 슬쩍 보고 지나갑니다. 한옥은 보는 대상이 아니라 소통하는 공간이 돼야 합니다.”
한옥에 살아본 사람들은 한옥은 사람이 끊임없이 드나들어야 상하지 않고 기품있게 유지된다고 말한다. 손길이 닿을수록 낡는 다른 물건들과는 정반대다.
대구의 남쪽 끝 지동마을(못골)에서 500년간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킨 고택이 대표적이다. 3300㎡가 넘는 이 넓은 한옥은 정몽주와 김종직에서 이어지는 성리학의 맥을 이었다고 평가받는 김굉필의 후손이 대대손손 살고 있는 곳이다. 500년 고택의 이름도 그의 호를 땄다. 한훤당 고택. 앞에선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반기고 뒤에선 500년 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사당이 고택을 감싼다.
이곳에는 아직도 김굉필의 20대손 김백용 씨(78)가 살고 있다. 그는 사람의 발길이 뜸해진 고택의 모습이 안타까워 대문을 활짝 열었다. 작은 건물을 새로 지어 카페로 만들고 사랑채와 행랑채를 손님들에게 내줬다. 한옥은 관찰 대상이 아니라 소통의 공간이 돼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반영됐다.
대구 남쪽 끝엔 조선시대 가옥이
수백 년을 버텨온 고택도 전쟁의 참상을 완전히 비켜가진 못했다. 치열한 낙동강 전투 과정에서 한훤당 고택의 많은 건물이 파괴됐다. 기와집 70여 채가 모여 있던 마을의 대다수 집은 철저히 파괴됐고 많은 이가 마을을 떠났다. 이제 지동마을에 남은 집은 13가구. 대부분 70대 이상 어르신이다. 김백용 씨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고택도 갈수록 낡았다. 세월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기 때문이다. 가끔 안채에서 나와 손님들과 대화하는 그는 “원래 한옥에선 집에 찾아오는 손님에게 물 한 잔이라도 나눠야 하는데 찾는 사람이 많아져 그러지 못해 카페를 열었다”고 말했다.
대구 남쪽 끝에 지동마을이 있다면 북쪽 끝엔 옻골마을이 있다. 경주최씨 집성촌인 옻골마을엔 20여 채의 조선시대 가옥이 모여 있다. 1694년 지어져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집인 백불고택도 이곳에 있다. 이 마을에선 한옥 스테이를 체험할 수 있다.
외곽에만 고택이 있는 건 아니다. 전국 최대 ‘젊음의 거리’로 꼽히는 동성로에서 한 골목으로 들어가면 관광객이 줄지어 사진 찍는 스타벅스 대구종로고택점이 나온다. 지난해 개장한 이곳은 스타벅스의 유일한 ‘진짜 한옥’ 카페다. 전국 곳곳에 지어진 전통한옥 모양을 흉내 낸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 1919년 지어진 고택을 개조했다. 앞쪽 사랑채는 헐리고 상가 건물이 들어서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100년이 지난 2019년에 본래 규모로 복원됐다. 안채는 100년 전 모습 그대로다. 처마 끝 풍경 소리를 들으며 마루에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다.
‘개항 도시’ 부산엔 100년 전 적산가옥들이
조선 말기 최초의 개항장이던 부산항 주변에서도 100년 넘은 고택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영남 사대부의 고택이 많이 남아 있는 대구와 비교해선 건축 양식에 차이가 있다. ‘적들이 만든 집’이란 뜻의 적산가옥(敵産家屋)이 그 주인공. 광복 직후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적산가옥은 오랜 세월을 거쳐 과거사 청산의 대상이 돼 대부분 사라졌는데 지금은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이자 현대적 활용도를 찾은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부산 수정동엔 전형적인 일본식 2층 목조 가옥이 들어선다. 일본식 정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대지에 맞배지붕 대문 세 칸과 몸채 한 동이 있다. 2층엔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마루를 설치한 긴 복도, 다다미방이 그대로 남아 있다.
광복 후 요정으로 사용되던 시절 이름인 정란각으로 더 유명한 이곳은 문화공감수정이란 이름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은 가수 아이유가 2017년 ‘밤편지’의 뮤직비디오를 찍으며 유명해졌다. 수정동에서 멀지 않은 초량동엔 높은 아파트에 둘러싸인 작은 적산가옥이 있다. 현대식 고층 아파트와 작은 2층 목조주택의 대비가 선명한 이곳은 1925년 지어져 20년간 일본인이 살았고 광복 후 80여 년간 한국인의 손길이 묻어 있다. 현재는 오초량이라는 이름으로 예술작품, 음악, 책이 어우러진 전시관으로 재탄생했다.
100년 동안 때론 사람들이 사는 공간으로, 때론 사람들이 거쳐 가는 공간으로 모습을 바꿔간 곳도 있다. 부산역 건너편 골목길의 붉은 벽돌 건물은 1927년 부산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이던 백제병원으로 지어졌다. 이후 1932년 중국요리집 봉래각, 1942년 일본 아카즈키부대 장교 숙소, 해방 후엔 중화민국 임시대사관 등으로 사용된 뒤 출판사 창비에 의해 복합문화공간 ‘창비 부산’으로 태어났다. 100년간 공간 정체성을 바꿔온 이곳의 역사는 건물 곳곳에서 묻어난다.
대구·부산=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
출처 :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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