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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벚꽃 맛집 남산도서관, 가부장제를 넘어선 두 예술가(김윤신/하이디부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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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벚꽃 맛집 '남산도서관'과 가부장제를 넘어선 두 예술가 '김윤식과 하이디 부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교통 좋은 데다 좀 짓지"…욕 먹었던 '벚꽃 맛집' 

남산도서관
"벚꽃 필 때 가보란 말에 겨울부터 기다렸다"
책소풍 최적의 장소…공짜로 책과 꽃 대여
일제시대에 건립된 경성부립도서관이 시초

지난 겨울부터 이 날만을 기다려왔습니다. 1월의 어느 밤, 2023 한경 신춘문예 시상식 뒤풀이 자리. 소설가 은모든 작가는 서울 남산도서관에 가보라고 했죠. '책 관련 공간을 소개하는 코너를 해보려는데 추천해줄 곳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말이에요.

술이 불콰하게 오른 저는 웃고 말았죠. “에이, 거긴 너무 유명하잖아요.” 그러자 은 작가가 ‘진실의 미간’을 좁히며 말했어요. “벚꽃 필 때쯤 가보세요. 거기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벚꽃 맛집이 있거든요.”

남산도서관 2층 디지털라운지의 유리문. 맨 오른쪽 문을 열고 나가면 남산하늘뜰이 나온다.

은 작가가 콕 집어 지목한 벚꽃 명당은 남산도서관 2층 정기간행물실 옆의 야외석입니다. 지난해 10월 개관 100주년을 맞아 정기간행물실은 새단장을 했어요. 신문과 잡지를 열람하던 공간을 카페처럼 꾸미고 노트북도 빌려 쓸 수 있도록 했죠. 디지털라운지로 이름까지 바꿨어요.

남산하늘뜰

벚꽃이 만개하자마자 남산도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디지털라운지에서 유리문을 열고 나갔더니 탄성이 절로 나왔어요. 2층 야외에 마련된 휴게실의 이름은 남산하늘뜰. 푸른 하늘 아래 흐드러진 벚꽃이 남산을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탁 트인 공간이어서 저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여마셔 보게 됩니다. 남산도서관에서 남산타워로 이어지는 ‘사람 반 벚꽃 반’ 벚꽃길도 내려다 보이더군요. 

남산하늘뜰에서 바라본 남산타워.

남산하늘뜰은 남산도서관과 서울시, 롯데홈쇼핑, 서울시교육청, 한국환경공단, 구세군이 함께 조성했어요. 현수막과 폐의류를 재활용해 이용객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의자와 탁자를 제작했어요.

섬유패널로 만든 널찍한 탁자를 손으로 두드면 ‘통통’ 경쾌한 소리가 나죠. 마름모꼴로 이어진 긴 의자는 아래를 비워서 책장처럼 활용해요.

이곳에서 봄바람이 살랑이는 날 커피 한 잔과 함께 책 한 권을 펼쳐 볼까요. 여유롭고, 한가하고, 낭만적이고, 일상이 멈춘 듯 호사스러운 시간을 만끽하는 거죠. 사람들은 책소풍이라는 뜻으로 북크닉(book+picnic)이라고도 하네요.

남산도서관에서는 3월부터 11월까지 ‘북크닉 세트’를 무료로 빌려줘요. 소풍 바구니에 사서들이 직접 골라준 책 두 권, 사진을 찍으면 진짜 꽃처럼 생생하게 나오는 조화, 돗자리 등이 들어 있어요. 남산도서관 1층 정문 입구 탁자에서 자율 대여가 가능합니다.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스캔해 신청서만 제출하면 됩니다.

남산도서관에서 빌려주는 북크닉 세트. 바구니에 책과 조화, 돗자리 등이 들어있다.

남산도서관 옆 공원에는 ‘다람쥐문고’라는 둥근원 모양의 조그만 책장도 설치돼 있어요. 숲 속 다람쥐가 도토리 까먹듯이 야외에서 책을 야금야금 읽고 다시 책장에 넣어두는 거죠.

남산도서관 옆 공원에 설치된 다람쥐문고

남산도서관은 매력적인 건축물입니다. 한양대 총장을 지낸 건축가 남계 이해성 교수가 설계했어요. 근대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굳이 봄날이 아니더라도 들러볼 만한 곳이죠.

남산도서관이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건 아니에요. 남산도서관의 출발은 일제시대 경성부립도서관이었습니다. 1922년 지어진 서울시 최초의 공립도서관이죠.

당시 위치는 명동성당 근처였습니다. 3·1운동에 놀란 일제가 식민지 교화 목적으로 한성병원 건물을 고쳐 도서관으로 만들었어요.

의도는 불순했지만 책을 접하기 힘들었던 시대에 단비 같던 공간이었어요. 오죽하면 소설가 고(故) 박완서 선생은 이곳을 “그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꿈도 못 꿔 본 별천지”이자 “꿈의 세계”라고 했을까요.

그는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남산도서관 이야기를 적었죠. “못다 읽은 책을 그냥 놓고 와야 하는 심정은 내 혼을 거기다 반 넘게 남겨 놓고 오는 것과 같았다.”

남산도서관 2층 디지털라운지 좌석

남산도서관은 이후 소공동으로 옮겨갔다가 1967년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았어요. 그때는 ‘왜 공공도서관을 교통이 안 좋은 곳에 짓냐’는 비판도 있었대요. 그때만 해도 공공도서관이 흔치 않았으니 접근성이 더욱 중요했겠죠.

하지만 도심의 소음 대신 남산의 풍광이 도서관을 감싼 덕에 독서의 정취가 깊어졌다는 장점도 있어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오죠.

“책을 읽는 재미는 어쩌면 책 속에 있지 않고 책 밖에 있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창밖의 하늘이나 녹음을 보면 줄창 봐 온 범상한 그것들하곤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사물의 그러한 낯섦에 황홀한 희열을 느꼈다.”

책 읽다가 벚꽃을 마주하는, 그 희열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남산도서관
-서울시 용산구 소월로 109
-디지털라운지 기준 이용시간
평일 09:00 ~ 18:00
토·일 09:00 ~ 17:00
-매월 첫째·셋째 월요일 및 법정공휴일 휴관

 

 

"교통 좋은 데다 좀 짓지"…욕 먹었던 '벚꽃 맛집' [구은서의 책이 머무는 집]

지난 겨울부터 이 날만을 기다려왔습니다. 1월의 어느 밤, 2023 한경 신춘문예 시상식 뒤풀이 자리. 소설가 은모든 작가는 서울 남산도서관에 가보라고 했죠. '책 관련 공간을 소개하는 코너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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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 깨부순 두 예술가…전기톱 든 88세 할머니, 아버지 서재 뜯어낸 딸

김윤신, 해방 이후 북에서 남으로 와
수용소 생활 등 고난 겪으며
"평생 하고싶은 걸 하자" 다짐
하이디 부허, 부드러운 재료로 사회에 저항
벽에 액체로 된 라텍스 바르고
다 마르면 벗기는 '스키닝 기법'

20세기 초중반, 세계는 그야말로 ‘격랑의 시대’였다. 두 차례의 대전이 전 세계를 휩쓸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의 후폭풍을 겪어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여성에겐 더 가혹한 시기였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에 전쟁까지 겹쳐 여성이 자기 꿈을 펼치며 살아가는 건 그야말로 ‘꿈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고난 속에서도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은 언제나 있는 법. 스위스의 하이디 부허(1926~1993)와 한국의 김윤신(1935~)이 바로 그런 예술가들이었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두 여성 예술가의 개인전이 지금 각각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와 남현동 남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두 여성 작가가 예술을 표현하는 방식은 달랐다. 한쪽은 단단한 재료로, 다른 한쪽은 말랑말랑한 재료로…. 그러나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세상의 편견에 맞섰다는 것이다.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
나무·돌 찾아 전 세계 누빈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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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재료를 내세운 쪽은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이다. 지난 2월부터 남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 ‘더하고 나누며, 하나’를 열고 있다. 김윤신은 홍익대 미대 출신에 1960년대 이응노, 한묵, 문신 등 한국을 대표하는 조각가들과 함께 프랑스 유학 시절을 보낸 ‘엘리트 예술가’다. 여기까지만 보면 유복한 집안에서 평탄한 삶을 걸어온 듯 싶지만, 최근 그를 만나 들은 88년간의 삶은 ‘안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강원 원산에서 태어나 해방 때 38선을 건넜어. 맨몸으로 강을 건너고, 수용소도 가보고 별일을 다 겪었지.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까 무서운 게 없어졌어. ‘내가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는데, 죽는 날까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는 생각뿐이었지. 대학생 때도 학기 중이건 방학 중이건 매일같이 나와서 작업했어. 오죽하면 한묵 선생이 나를 ‘극성쟁이’라고 불렀을까. 하하.”

전쟁 통에서 살아남은 경험은 김윤신이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새로운 재료’를 찾아 전 세계를 누비는 원동력이 됐다. ‘여자는 결혼해서 남편 내조하는 게 미덕’이던 시대엔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를 특히 매료시킨 건 딱딱하기 그지없는 나무와 돌. 1984년엔 단단한 나무를 찾아 혈혈단신 아르헨티나로 향했고, 1988년부터는 다이아몬드만큼 단단한 돌인 ‘오닉스’를 쫓아 멕시코와 브라질에 터를 잡았다.

“아르헨티나에선 햇빛이 강해서 그런지 나무가 엄청나게 딱딱해. 전기톱을 들이밀면 ‘쑥’ 하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나무가 톱을 튕겨낼 정도야. 나무 조각이 자칫 목 쪽으로 날아오면 그대로 끝이야. 그래서 작업을 할 땐 온 힘을 다해서 집중해야 해. 아직도 무섭지. 그래도 뭐, 어쩌겠어. 계속 해야지.”

“죽는 날까지 조각하고 싶다”

남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은 그렇게 ‘계속 해온’ 결과다. 미술관 자체가 김윤신의 70여 년 예술인생을 응축해놓은 듯하다. 1층에는 그가 1988~2002년 멕시코와 브라질에서 제작한 석조각이, 2층에는 그가 1970~2010년대에 만든 목조각이 놓여있다.

88세의 나이에 직접 전기톱을 들고 만든 신작도 있다. 2층과 야외에 설치된 형광색 목조각이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김윤신이 고향의 칠흑 같은 밤하늘을 수놓던 별을 떠올리며 나무조각에 새겨 넣은 작품이다. 그는 요즘도 매일 전기톱을 들고 목장갑을 낀다. 야외 작업이 많아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톱질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영화 속 여전사를 떠오르게 한다. 국내 여성 조각가의 막을 올린 그에게 남은 목표는 뭘까.

“예전엔 미대 나오고도 아무 것도 못하는 여성이 너무 많았어.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 앞으로 죽는 날까지 작품을 만들고, 그 안에 담긴 내 정신을 수많은 ‘딸래미 제자’에게 남겨주는 것, 그게 내 목표야.” 전시는 5월 7일까지다.

스위스 설치미술가 하이디 부허
부드러운 재료로 사회에 저항

잠자리의 욕망

김윤신이 딱딱한 재료를 내세웠다면, 스위스 출신 설치미술가 부허는 반대로 부드러운 재료로 사회에 저항했다. 부허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가 개발한 ‘스키닝(skinning)’ 기법부터 알아야 한다. 딱딱한 바닥과 벽에 액체로 된 라텍스를 바른 뒤 마르면 한 겹씩 벗겨내는 기법이다. 마치 공간에 말랑말랑한 피부를 붙인 후 이를 벗겨내는 듯하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부허의 개인전 제목이 ‘공간은 피막, 피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허는 스키닝 기법을 통해 서재 등 남성의 공간을 한 꺼풀씩 벗겨냈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신사들의 서재 파르케트 플로어링’(1979)이 그렇다. 부허의 아버지가 사용하던 서재를 2년에 걸쳐 스키닝한 후 46개의 조각으로 잘라낸 벽에 걸었다. 권위적인 공간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서재는 남성, 부엌은 여성의 공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깨뜨린 것이다.

높이 3m, 너비 5m의 거대한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1988)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지닌 질병을 히스테리(신경증)로 치부하고 정신병원에 가뒀던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을 스키닝해 전시장에 옮겨왔다. 이런 부허의 작품은 당시 무척 보수적이던 스위스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전시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부허의 아들 인디고는 “스위스는 1971년이 돼서야 여성 참정권이 인정될 정도로 보수적이었던 곳”이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는 작품을 통해 스스로를 해방시키고자 했다”고 말했다.

말랑말랑…‘조각의 개념’을 깨다

부허의 작품이 재조명받는 건 그가 단순히 ‘해체’에만 머무르지 않아서다. 전시장 곳곳에 놓여있는 잠자리 날개, 조개껍질, 생선 비늘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두 부허가 즐겨 쓰던 소재다. 이들의 공통점은 반짝거린다는 것이다. 전시를 기획한 문지윤 아트선재 디렉터는 “반짝인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고, 움직인다는 건 흐르고 변화한다는 뜻”이라며 “부허는 이런 소재를 통해 권위의 해체를 넘어 변화를 추구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부허의 ‘말랑말랑한 예술세계’가 깨부순 건 남성중심적 관념뿐만이 아니다. 그는 조각에 대한 고정관념도 깼다. 1970년대에 선보인 ‘입을 수 있는 조각’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대리석, 나무, 청동 등 딱딱한 조각과 달리 부드러운 스티로폼으로 만들어 누구나 작품을 입을 수 있도록 했다. 이번 전시에선 부허의 작품을 복제해 관람객이 입어볼 수 있도록 했다. 전시는 6월 25일까지.

 

가부장제 깨부순 두 예술가…전기톱 든 88세 할머니, 아버지 서재 뜯어낸 딸

20세기 초중반, 세계는 그야말로 ‘격랑의 시대’였다. 두 차례의 대전이 전 세계를 휩쓸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의 후폭풍을 겪어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여성에겐 더 가혹한 시기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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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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